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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르지 못하면 아이들을 바르게 가르칠 수 없다” 영광합기도 최수남 관장영광합기도 최수남 관장 =사진/김나형 기자 체육관을 운영하게 된 계기 처음엔 야구로 시작했어요. 이후에 레스링을 했는데 부상으로 인해 합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이후 체대진학을 하고 사범생활을 3년 하고 광주와 장성쪽에서 체육관을 시작했어요. 그러다 영광쪽에 친구가 인수를 부탁해서 영광으로 넘어와 체육관을 운영하게 됐습니다. 체육관 인원 현재 150명 인원을 가지고 있고 연령대는 최고 46세도 계십니다. 여성분부터 아이들 등 다양한 연령대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합기도장점? 합기도는 쉽게 호신술을 배우신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현재 합기도는 일반 사업자에서 면세사업자로 변환이 됩니다. 또한 학생들이 공무원 등 진학 관련에 유리하고 진학전 단증을 딸 수 있어서 공무원하는데에 점수가 들어 가서 좋죠. 합기도 운영하며 느끼는 점 항상 느끼는 건 아이들에게 오래, 길게 가르치고 싶어요. 그래서 그렇게 하려면 내가 뭘 해야 할까 생각을 하다가 내가 석사, 박사는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서 현재 석사를 마치고 박사 과정을 1년째 공부중 입니다. 합기도관 운영에 부모님, 가족들 의 생각 어머님은 돈을 벌려면 차라리 식당을 하라고 하세요. 체육관으로 돈을 벌려고 했으면 하지 않았을겁니다. 사명감으로 할수있는 것 같아요. 와이프는 간호사 출신인데 많은 격려를 해줍니다. 너무 고맙죠 기억에 남는일 관원생 중 95%가 초등학생인데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바르게 가르쳐야 하고 체벌이 있더라도 내가 바르지 못하면 아이들에게 바르게 가르칠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인성이 나쁜건 봐줄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예전 일인데 한 학생이 부모님과 통화를 하다가 ‘아이씨’라고 하는걸 들었어요. 체육관으로 데려와서 잘못한 부분에 대해 알려주고 훈계를 했었던 적이 있는데 아이가 많이 바뀌는 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보람을 느낀적 예전에 장성에서 여자아이를 가르친 적이 있어요. 어쩌다 목포에 일이 있어서 갔는데 목포에 경찰이 되어있었습니다. 또 영광에서 한 친구가 공부에 소질이 있는데 운동에도 소질이 있었어요. 그 친구를 부모님께 1년 정도만 맡겨달라고 부탁하고 3개월 시합 준비를 해서 1년내에 6개 수상이력을 가졌어요. 현재 원광경찰대학에 진학 했습니다. 그런 모습들을 볼 때 굉장히 보람을 느낍니다. 앞으로의 계획? 일단은 박사과정 마무리가 중요한 것 같아요. 영광 친구들에게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열심히 공부를 더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계획보다는 내 자신이 잘하는것을 하고 싶고 안정적이게 운영하는 것 밖에 없는 것 같아요. 함께하는 사범, 직원들이 안정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영광, 청소년문화센터 또는 성인 을 위해 노력해주는 방안? 청소년 문화센터에서 아이들 진로 멘토로 활동을 하고있는데 청소년들을 위해 진로 계획을 하고 있어요. 짜여져 있는 교육보다는 멘토식으로 하는 교육을 하고싶고 또 청소년 관련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할것입니다. 체육회장선거? 체육계관련하여 청치권과 체육원을 분리를 하는 시작인데 그 시작은 이왕이면 체육을 잘 아는 사람이 했으면 좋겠어요. 체육을 이해하고, 많이 알고 좀더 관련이 있는 사람이 하면 생활체육 지도자나 동호인 등을 위해 복지도 염려해줄것이고, 또 훈련등에 환경 개선을 위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의 꿈이 무너져 버리는 것은 방지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 지역 아이들, 체육인들, 모두가 체육을 많이 접할 수 있는 환경이 되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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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들 집수리도 해드리고..너무 좋아요!" 대마면 이영임 마크라메 Artist영광에 온 지 7년? 대전이 고향이고 원래 병원에서 일을 했어요. 그리고 영광에 우연치 않게 놀러왔다가 신랑과 같이 내려오게 됐습니다. 사실 적응하는데 힘든 건 없었어요. 워낙 조용한 걸 좋아하고 일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접하다 보니 심적으로 지쳐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여기 와서 적응하기도 편하고 조용하기도 하고 여기 마을에서 저희가 막둥이 역할을 하고 있어서 혼자 계시는 어르신들 집수리도 해드리고 7년째가 되니 적응은 이제 다 했죠! 너무 좋아요. 나무숲거미줄 뜻? 저희 작품에 그림 그려 주시는 선생님이 계세요! 문화 예술 활동하시는 분인데 그 분께서 만들어 주신 거에요. 저희는 이 의미만 두고 궁금해 하며 오셔서 보셨으면 해요. 계속 전시를 기획하면 나무숲거미줄 1차, 나무숲거미줄 2차 이렇게 나갈 거라서 이번 주 까지 무료 관람이니 오셔서 구경도 하시고 뜻도 알아가셨으면 좋겠어요! 처음 시작 계기? 어릴 때부터 손으로 만들 수 있는걸 참 좋아 했어요. 기계로 하는 재봉틀 같은 것보다 인형 만드는 것, 인형드레스 만드는 것 또 십자수 매듭 공예 이런 걸 좋아 했어요. 취미로 배우기 시작하고 신랑도 DYI(do it yourself)로 하고 같이 공방 다니면서 배우고 둘 다 직장 다니면서는 취미로 시작을 할 수 밖에 없었어요. 그러다 영광 내려 와서 집 짓고 집 안도 꾸미고 하다보니까 자연스럽게 더 발전이 됐던 것 같아요. 보람을 느낀 적? 작업하고 결과물이 나오면 저도 물론 좋지만 그걸 보고 신기해하고 좋아해 주시는 모습을 볼 때 기분이 좋아요. “아 신기하다 아 좋다~~” 그런 한마디가 참 만드는 사람한테는 가장 좋고 보람을 느끼는 것 같아요. 힘든 점은? 저희는 다 오일 마감을 해요. 하루를 온전히 건조시키고 3-4번 정도 해야 해요. 주문을 하시면 2주는 넉넉히 잡아야 상품이 나와요. 거의 다 만들었던 작품을 마지막에 실수하는 경우도 많아요. 제대로 결과물이 안 나오면 전부 다 풀어서 다시 해야 해요. 모든 작업이 다 그렇긴 한데 나무 같은 경우 재단을 잘못 하거나 조금의 실수가 있으면 상품 가치도 떨어져버리고 톱날 작업 같은 경우는 한번만 엇나가도 작품이 망가지는 거기 때문에 그런 점이 속상할 때가 있죠. 앞으로의 계획? 올해는 교육도 하고 더 많은 것들을 보여 드리고 싶어요. 계속 만들고 보완할 점 보완 하고 지금 현재 정해져 있는 목공예 수업은 교육청 밖에 없고 마크라메(유럽식 매듭 공예)는 거기에 접목 할 수 있다면 그렇게 같이 하려고 하고 있어요. 더불어 미술도 나무 원목에 접목 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이 있어요. 그래서 영광에 미술 하시는 분들과 콜라보로 생활목공예를 해서 집에서 쓰실 수 있는 것들로 볼 수 있는 전시회를 열어 보고 싶어요 편하게 구경 삼아 오셔서 이런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곳이 있고 이런 문화가 있다는 걸 아시는 정도만 되어도 참 좋 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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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을명 뿌리근 대한응급구조단 '신명근(29)'님◇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원래는 대학교를 갈 생각이 없어서 고3때 취업을 나가려고 면접까지 끝난 상황에 친구들과 졸업여행으로 바닷가를 갔어요 그때 친구한 명이 물에 빠져서 죽을뻔한 적이 있었어요 들어가서 그친구를 물에서 건져 나왔는데 응급처치라는 개념이 없어 심폐소생술 이라던지 할줄몰랐던 경험이 있었어요 그때 이후로 사람을 살리는게 뭘까 생각하다 대학교를 보건대 응급구 조과를 가게되었어요 임상을 경력으로 2년 쌓고 특체로 소방공무원시험을 준비 하여 과 특성자체 소방공무원으로 시작을 하는데 저같은 경우는 이일이 누군가는 해야될 일이기도 하고 저는 기회가 잘 되어서 본사 목포 에서부터 시작을 하게 됐죠 ◇대한응급구조대란? 현재는 영광기독병원과 계약업체예요 병원에서도 구급차를 운영할수있는데 위탁계약을 저희한테 맡겨서 저희가 응급환자가 있을 경우 이송을 다니고 영광관내에서 노인요양시설이 있으니 입퇴원 하시는 어르신들 을 모셔다 드리는 일도 같이 하고 있어요 우리영광내에서 종합병원 기독병원 가까운 병원에서 이송을 해주는일이라 하면 119라고 생각하시면 되고 제가 하는일은 여기는 시골 단위이다 보니 어르신들이 많아 대학병원으로 가셔야 하는 분들이 많고 더불어 서울이나 경기도쪽 부산쪽 장거리 환자분들을 이송하는 일입니다 ◇이일이 위험하다 느낀적 은? 제가 위험하기보다 간혹가다 정말 응급인 환자분들이 계셔서 이송도중에 CPR이 터져 위급한 상황이 있어요 그럴때는 영광에서 광주에 큰 병원으로 빨리 가야할 때 응급환자기에 조심히 운전 하려해도 급하게 이송을 해 야하기 때문에 조금 위험하다고 생각하지만 환자분을 최대한 빨리 안전하게 이송 해드리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일하면서 회의감을 느낀 적은? 병원구급차도 마찬가지지만 저는 민간 구급차라 이송료가 붙어서 사설구급차란 이미지가 강해 돈벌이 수단으로 운행을 한다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마음이 좀 속상할때도 있어요 ◇부모님은 하시는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 안좋은걸 많이 보게되고 출동할시 운전쪽으로 위험하니까 그런점을 걱정 하시죠 ◇일하며 보람을 느낀적은? 영광쪽엔 어르신들이 많기에 보호자 같은경우는 아버지나이이시다 보니 이송차에서 처치하는건 한정적이에요 보호자랑 같이 걱정하고 안전하게 이송해 드리고 나중에 다시 뵈었을 때 저에게 덕분에 잘 치료 마치고 왔다 고맙다 라는 말을 들었 을 때 참 보람을 느끼는것같아요 이런점들로 인해 저는 이일 을 계속 이어 나가고 싶고 더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일하는시간은? 24시간 대기하고 있습니다 일자체가 언제 응급 환자가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기에 쉬는날 없이 하고 있습니다 총직원은 저까지 3명인 데 두명은 평일 주말 나눠서 하고 직원을 지금도 구하고 있는데 잘 구해지지 않네요 아무 래도 24시간 대기를 해야한다 하니 다들 부담을 가시지 는 것 같아요. ◇기억에 남는일 한번 응급환자를 이송해주는데 보호자가 어디서 많이 뵌 분이더라구요 이송을 마치고 보니 군대 후임이었어요 친구인데 8-9년만에 얼굴봐서 반가웠는데 아버지가 많이 안좋은 상태이셔서 반갑게 인사할수도 없고 친구이기 전에 보호자니까 조심스러웠었죠 이송을 마치고 아버지 괜찮으실거라고 위로하며 이야기하고 헤어진 기억이 나네요. ◇앞으로의 계획은? 항상 대기를 해야하는 일이기 때문에 주말에 쉬고싶고 여가생활도 보내고싶고 여행도 가고싶고 그런게 있긴 하지만 저는 아직은 시기상 조라고 생각해 조금더 노력 하다보면 좋은일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요 저도 생각하고있는 부분이 있으니 지금 고생하는것쯤은 괜찮다고 생각해요 영광내에서 제가 더 자리를 잡고 보건소 라던지 우리 지역 행사 영광에 체육쪽 전지훈련도 타지에서 많이 오시고 하시는데 소방서에서도 지원나오는 경우도 있겠지만 이부분 에서 저희도 나가드릴 수 있거든요 이런 부분에서 발벗고 저희가 이바지할수있다면 더 보람찰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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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기 닥터 영광읍 김성철씨_우리동네N띵동~~"누구세요?" "네. 안녕하세요 고객님. 정수기 점검온 코웨이 코닥김 성철 입니다." "남자에요? 고객센터에 연락해서 여자코디로 바꿔달 라할테니 그냥 가세요" ㆍㆍㆍㆍ 2002년 31살의 나이에 당뇨 라는 진단을 받을때, 동업으로 하던 사업장 마져 문제가 생겨 빚까지 떠 안았다. 몸이 너무 안좋아져 2003 년 고향으로 내려왔고 빚독 촉에 시달리던 나는 파산 신청을 하기위해 광주법원을 찾았다. 그 곳에서 순서를 기다리며 대기중 옆에 있는 신문을 보게 되었고 구인 광고란에 코웨이 코닥 모집 광고를 봤고 순간 내 자신에게 질문을 했다. '넌 니 인생에 최선을 다해 살았니? ' '넌 이 빚을 갚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니?' 스스로에게 하는 나의 질문에 그 곳에 앉아있는 내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고 난그 신문지를 들고 나와 신문에 실린 번호로 전화를 걸고그 길로 일을 해보겠노라 사무실을 찾아갔다. 그렇게 시작된 코웨이 점검인 코닥인생 15 년. 처음엔 남자라는 이유로 문전박대도 당하구 점검내내 긴장하며 나를 노려보는 분도 계셨다. 점검물품이 담긴 가방을 대여섯개씩 메고 고객집을 찾아가다 보면 지인이 살고 있는 집이라 창피한 마음이 들때도 많았다. 남자가 오죽 할일이 없으면 이런걸 하냐고 내성적인 내게 별 생각없이 하는 고객님 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꽂힐때도 많았다. 첨엔 모든 것이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지병으로 어머님이 돌아가 시고 아버지와 둘이 남게 되었고 아버지마져 병을 앓게 되시면서 난 나와의 싸움에서 더더욱 이겨야 하는 이유 만이 남았다. 그렇게 하루 하루 열심히 달리다보니 고객님들 집에 전구도 갈아주고 혼자사시는 어르신들 집에는 식사도 챙겨드리면서 점차 남자인 나를 더 반기는 분들이 생겼다. 하루는 연락이 전혀 안되는 고객님이 계셔 점검도 해야 하는 상황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어 고객님 집에 불이 켜지기만을 기다려봤다. 자정이 넘어서야 돌아오신 고객님께 상황 설명을 드리고 새벽 1시에 점검을 하고 고객님의 안부도 확인하고 돌아왔다. 그리고그 다음 날 정말 드라마같은 일이 벌어졌다. 모 회사라며 1시까지 방문을 요청해 주셨고 영문도 모른채 약속장소로 찾았더니 어제 자정 넘어 방문했던 집이 이 회사의 간부님 댁이 었던것. 나의 마음에 고맙다며 고객님의 남편분께 얘기를 했고 한 회사의 고위급이 었던 남편분이 나를 회사로 불러 회사 곳곳에 비대와 정수기를 주문 해주셨다. 그렇게 연이 되어 정말 많은 소개로 연결되어 편찮으신 아버지 병원비 걱정을 덜수 있었고 나의 빚도 다 갚을수 있었다. 그렇게 나의 일에 마음을 다했더니 내게 너무도 과분한 행운이 따라오더라. 나도 때론 나쁜 사람이었을 것이고 철없이 다닐적도 많았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 기도 했을것이다. 그런 내게 이 직장은 나에게 성실을 가르쳐 주었고 믿음을 심어 주었고 사람을 얻게 해주었다. 지금은 그 누가 나에게 남자가 이 일 하는거 안 창피 하냐 물으면 난 너무 행복 하다 말한다. 나는 코웨이 코닥 김성철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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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어는 나의 모든 것 백수읍 위대영씨대파가 줄지어져 있는 백수 읍의 넓은 들판 사이에 새하얀 비닐하우스 몇 동이 자리 잡고 있다. 깔끔하게 정리정돈 된 비닐하우스 주변에서 농부의 부지런함이 느껴진다. 이 비닐하우스는 아직 소년의 모습이 남아 있는 위대영 (26)씨의 일터이자 보금 자리다. 워낙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의 고생을 옆에서 지켜 보았기에 대를 이어 내가 농사를 지을 거라고 생각 조차 못했다고 한다. 보통의 농촌 아이들이 부모님의 농사일을 돕은 딱 그정도 였기에 당연히 도시에서의 멋진 삶을 꿈꾸었고 진로도 IT분 야로 잡고 준비 중 이었다. 그의 설명을 통해 젊은 농부가 된 사연을 들어 보았다. 대학 진학을 앞둔 어느날, 그의 아버지는 한농대에 관한 자료를 건네주셨다고 한다. 이런곳이 있으니 한번 읽어나 보라고 슬쩍 건네시는 아버지의 뜻을 조금은 알 기에 구석에 던져놨다 며칠뒤 읽어보았다. 그 자료를 읽는 순간이 내인생의 갈림 길에서 내가 길을 선택해야 하는 시점이었던것 같다. 한번 읽어만 본 다는 것이 어느새 나는 한농대 학생이 되어 있었고 그 곳에서 마주하는 농업의 현실과 미래는 내기억과 생각과 미래를 통채로 바꾸기에 매력이넘쳤다. 교수님들에게 듣는 이론적 교육과 친구들의 경험담으로 전해 듣는 실무교육은 나를 더 단단하게 농업인으로 바꾸어놨다. 각 분야에서 이미 부모님의 경험을 눈으로 보고자란 친구들이라 우리 부모 세대의 경험에 우리들의 미래적 가치를 더 하니 농어업인으로 우리가 해 나갈 일이 무궁무진 하다는걸 알게 되었다. 졸업을 했지만 지금도 정기 적으로 모임을 통해 각분야의 농어업일들을 서로 공유 하고 의견을 보탠다. 난 장어를 키운다. 너무 예민한 어류다 보니 잠깐의 무관심에도 치명적이다. 늘 관심을 가지고 정성을 쏟아야 한다. 학교를 다니며 실습을 나갔을 때 공들인 장어들이 잠깐의 실수로 물위에 둥둥 떠있는 걸 보고 며칠 동안 마음 아팠던 기억이 있다. 이 일을 내가 감당 할 수 있을지 다시 한번 내 인생에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던 시간 들이었다. 새벽마다 양식장으로 나가 물을 체크하고 먹이를 준다. 행여라도 물 환경이 조금이 라도 변하면 민감한 장어는 금세 나쁜 결과를 보여준다. 단하루도 빠트려선 안되는 일과이다. 부모님께 배운 이 양식장에 시스템을 더하기위해 난 계속해서 공부를 한다. 좀더 좋은 환경을 만들기위해 배우고 고치고 나의 부모님이 그러하셨듯 나도 정성을 쏟는다. 이제 내가 걸어가야 하는 길은 하나뿐이다. 나의 롤 모델인 아버지가 한평생을 가족을 위해 열심히 걸어오셨기에 이젠 그 의 길앞에 걸림돌을 치우고 닦아 아들옆 에서 흐뭇하고 편안하게 함께 걸어가시는게 하는거 그마음으로 걸어갈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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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에서 10년 이제 나도 영광 사람 영광읍 최영미님만남의 광장 부근에 작은 카페를 하는 63년생 최영미님. 아이들 키우느라 내이름 석자조차 잊어버리고 살다 아이들이 내 품에서 떠나고 나니 내가 할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다. 내 이름조차 어색한 중년의 모습이 거울속에 나라고 서있다. 빙의가 되듯 젊은 날 내모습이 순간순간 비춰보이는데 이내 사라지고 만다. 뭐라도 해야겠단 생각에 직장을 다니려해도 이력서를 채울 글은 내 인적사항뿐... 열심히 살아온 내 삶을 이종이 한장에 채우려는데도쓸 말이 없다. 분명 나역시 열심히 걸어왔건만 허무한 시간이었다. 지인의 소개로 마트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두번의 큰수술을 받았던 나의 몸은 나를 오랫동안 서서 일하는데 허락지 않았다. 그때 우연히 찾아온 이 작은 공간이 내 지친 몸과 마음을 채울수 있을듯 했다. 그렇게 시작된 카페. 손수 재료를 구입하고 정성 스레 씻고 썰고 예쁜용기에 담아 잘 숙성시킨 애들을 고객님들의 찻잔에 담아 드릴때 행복을 느낀다. 화려하고 고급스런 찻집들이 많이 생기고 있어 내게 영업에 지장이 많겠다고 걱정들을 해주시지만 나의 이작은 공간에 찾아오시는 분들은 대부분 나와 같은 대답을 눈빛으로 답하신다이 공간은 화려한 브랜드도 없고 고급스런 컵도 없지만 심장소리마져 들을수 있는 작은공간에서 마음을 따뜻 하게 채워갈수 있어 괜찮다고.. 영광남자를 만나 이곳으로 이사온지도 10년. 이젠 이방 인이 아닌 영광사람이다. 이 작은 공간은 커피숍이지만 때론 커피향이 아닌 김치 냄새, 고구마 냄새가 난다. 이 곳에서 장사하며 인연이 되신 분들이 김치닮았다고 가져다 주시고 고구마 삶았 다고 가져다 주시고 그분들의 마음이 너무도 고맙고 따뜻해서 커피향이 아닌 김치 냄새가 나도 난 함박웃음이 지어진다. 다른 손님들도 그 냄새에 허허 웃으신다. .'또 누가 김치 닮아 왔나보네. ' 내 가게를 두고 단골 손님 들은 이 곳은 주인장과 손님이 닮아가는게 참 특별한 곳이라 한다. 난 그 말을 듣는게 참으로 좋다. 사람 냄새가 난다는것이 나라는 사람의 가치를 느끼게 해준다. 올 5월 이면 이곳에서 자리 잡은지 벌써 5년이 된다. 따뜻한 봄날 나를 있게끔 해준 많은 고객님들께 따뜻한 차한잔씩 대접해드리려고 준비중이다. 가게가 좁아 불편한점도 많으실텐데도 그런게 사람 사는 재미라며 웃어주시는 고객님들께 이 글을 통해 감사인사 드립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 오잉. 최영미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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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전27승1패 다시 일어서는 챔피언채승곤복싱클럽이란 간판이 새로 올려져있다. 여자인 내 눈에는 복싱이라면 그저 ‘다이어트될까?’ 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어떤 사람이기에 자기이름을 걸고 복싱장을 오픈하는 걸까 궁금증에 네이버에 그이름 석자를 검색해봤다. 매니 파퀴아오라는 선수와 시합을 한 동영상이 쭉 나온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들도 나온다. “프로복싱 28전 27승 22KO 1패” 복싱을 모르지만 뭔가 대단한 성적이란 느낌이 팍 온다. 그 삶이 궁금해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려 체육관을 찾았다. “안녕하세요. 전 75년생 채승곤입니다.” 완도가 고향이고 영광엔 친구들이 있어 오가다 영광에서 한번 살아보고싶다는 생각에 체육관을 오픈하게 되었습니다. 학교다닐때부터 공부엔 관심이 없고 운동만 하고 다녔습니다. 아버지가 또 운동을 좋아하셔서 아버지의 응원 으로 전남체중을 가면서 레슬링부터 시작하다 18살에 권투로 바꾸었죠.19살에 선수가 되겠다고 서울로 올라와 체육관에서 생활하면서 운동을 이어갔죠. 청소도 하고 링위에서 이불깔고 자고, 저희는 운동 시간과 자유시간이 불규칙해 직장생활은 못하고 식당 이나 중국집 같은 배달 위주의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이어가며 프로대비전을 준비 했습니다. 4회전 7번, 6회전 2번,8회전 1번,10회전 10번 한국랭킹광 한국챔피언전을 거쳤죠. 프로복싱 전적 28전 27승 1패인데 그 선수가 매니 파퀴아오네요. 딱 그 선수에게 한번 패배했네요.“그 렇게 달려가시다 왜 그만두 셨어요?” 옆에 계신 채승곤님과 닮아 보이는 분이 대답하신다. 아버지가 뇌종양으로 쓰러 지시면서 그만두게 되었죠. “실례지만 두 분 많이 닮으 셨는데 관계가 어떻게 되세요?” 형제 입니다. 제가 6살 위 형입니다. 아~ 두분이 이 체육관을 같이 운영하시나요? 저는 본업은 따로 있고 동생 도와주려고 짬이 날 때 이리 옵니다. 아버지가 쓰러지시고 누워계셔서 동생이 아버지 병간호 한다고 운동을 그만두었죠. “채승곤님 아버지를 돌볼 사람이 없었나요? ” 아버지가 제 꿈이고 희망이 어서 아버지가 쓰러지시는날 제 꿈과 희망도 없어졌으니까요. 늘 제 시합장엔 아버지가 와 계셨어요. 아무말 없이 제 시합을 보시고 트로피 받으면 그걸 품에 안고 완도까지 가셔서 배타고 집까지 가셨죠. 늘 시합장 한자리에서절 바라보고 계셨죠. 그렇게절 지켜봐주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방황하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는다고 또 할수 있는 짓이 이것밖에 없어 글 러브를 다시 끼네요. 아버지는 안계시지만 또 이리 형이제 옆을 지켜주고 있으니 ... 끝말을 흐리시는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진다. 그런 그를 또 미소로 바라보고 있는 한분. 이 형제들의 눈빛으로 그 아버님이 얼마나 이 형제들에게 믿음이란 크나큰 나무를 심어놓으셨는지 보였다. “권투를 잘하면 일상에서도 싸움을 잘 하나요?” 밖에서는 안 싸워봐서 잘 모르겠습니다. 세계챔피언이 될 선수를 키워보고 싶다는 채승곤씨의 꿈이 이루어 지길 간절히 바래본다. 그럼 우리 고장 영광에서도 복싱 세계챔피언도 배출되는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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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은 나의 천직이며 아이들은 나의 운명이다.학창시절 부모님이 힘들게 버신 돈은 우리 삼형제의 학원비와 과외비로 대부분 나갔다. 그럼에도 난 부모님 모르게 운동을 했다. 야구, 레슬링, 합기도 등 운동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을 만큼 운동이 좋았다. 공부하라는 부모님의 말에 반기를 들듯 미친듯이 운동만 하던 어느 날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은 내게 내 인생 전체를 놓을만큼 큰 충격 이었다. 너무도 건장하셨고 내게 그어떤 산보다도 컸던 아버지 였기에 고 3때 아버지의 죽음은 감당하기 어려운 공허 함이었다. 그 후 난 운동은 하지 않을 거라 여겼다. 좋은 성적 한번 못보여 드린것이 그리도 후회가 될줄 이야. 그냥 운동만한 나 자체가 아버지에게 큰 불효를한 기분이라 운동을 접기로 맘먹었다. 그렇게 도망치듯 지원해 군대에 갔다. 제대후 대형면허를 따 버스를 운전 하기 시작했다. 결혼을 하고 아이 아빠가 되고, 시골길을 운전하는 내모습에 그럭저럭 만족한다고 행복하다고 여기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18명의 관원이 있는 영광합기 도를 맡게 되었고 두번 다시 하지 않을거라 다짐했던 운동은 내게 운명처럼 돌아왔다. 행복했다. 즐거웠다. 살아 있음을 느꼈다. 난 운동으로써는 내 자신이 공인이라 여긴다. 내 새끼들이 여기저기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데 내가 감히 어디서 나쁜 행동, 나쁜 마음을 먹을수 있겠는가. 늘 관원의 아이들이 먼저라내 가족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집에 계신 어머니, 아내, 아이들까지 이런 나를 자랑 스럽게 여기고 응원해 주고 기도해 주시는 그 마음을 잘알기에 난 더더욱 내 아이들을 사랑하고 보살필수 있다. 7살 꼬마였던 녀석이 이제 성인이 되어 소주한잔 하자며 찾아온다. 고민을 털어놓을 유일한 멘토라며 찾아오는 아이들을 보면 내가 그래도 열심히 살았구나 라는 생각에 크나큰 상을 받는 기분 이다. 운동을 사랑하는 아이들이 당당하게 운동할수 있게 만들어 주고파 난 계속 공부를 한다. 학창시절 그 많은 돈을 주고도 하지않았던 공부를 마흔이 훌쩍 넘은 이 나이에 내발로 찾아가 대학원 등록을 하고 책을 펼쳐든다. 운동으로도 성공할수 있고 행복하게 살수 있는 길을 아이들에게 만들어 주고파 고민을 하고 공부를 한다. 아이들을 나를 멘토라 부른 다. 아이들의 멘토라는데 내가 어찌 현실에 주져하는 관장만 할수 있겠는가. 아이들의 더 밝은 미래를 위해 나의 미래를 만들어간다. 난 아이들과 함께 웃는게 좋다. 아이들이 잘못을 하면 따끔하게 야단도 친다. 그것은 나도 이 아이들의 부모라 생각하기에 그렇다. 내 자식 들이기에 혼도 낸다. 난 아이의 꿈을 응원해 주는 부모이고싶다. 물론 내 품안에 있는 내 자식들이니 운동의 꿈을 가진 아이들이 많다. 건강했으면 좋겠고 행복했 으면 좋겠다. 꿈을 가졌음 좋겠고 그 꿈을 향해 달려가고 이루었음 좋겠다.많은 아이들이 시합에 나가길 바래 대형버스도 구입했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아이들이 시합에 나가 매달을 따고 용기를 얻었으면 하는 마음하나로 가족 모르게 버스를 구입했다. 나중에 어머님이 알게되어 등짝 한대 맞긴 했지만 이런 나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가족이 기에 그져 아이들 태우고 안전하게 운전하라고 하신다. 버스운전기사였던 경력이또 이렇게 쓰일 줄이야. 돌고돌아온 내 인생길이 다 내가 지금 이자리에 있게 함의 준비였던것 같다. 생물학적 아이는 1남2녀이다. 허나 내 아이를 말 하라면 100명이 넘는다. 난 그누구보다 자식을 많이 낳은 아빠이다. 그 누구도 부럽지 않다. 내아이들이 긍정적인 마음 으로 꽃보다 더 예쁜 미소로 자기들의 꿈을 향해 자라는걸 지켜보는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임을 안다.` 이 아이들이 나의 꿈을 이루게 해주었기에 내 모든 삶은이 아이들에게 맞춰있다. 관장 최수남ㆍ인간 최수남의 목표는 우리아이들이 대학부터 취업까지 노력한 댓가를 받을수 있게 하는것이다. 그 목표 하나로 난 오늘도 배우고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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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지붕 두가족"저의 이야기를 들려주라구요? 내 이야기? 뭐지..내가쓸 이야기가 있나?" 한지붕 아래 꽃집과 미용실이 있다. 부산사투리가 예쁜 꽃집아가씨에게 어찌 영광에 와서 살게 되었는지 서른 두해를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라 했더니 수줍게 웃는다. 이내 침묵이 흐르고 자기 이야기 별것 없다던 지현씨의 두 뺨에 눈물이 흐른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이 입을 뗐다. "나 왜 이러지. 왜 눈물이 나노.." "언니 저는요 부산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클 때는 아빠는 운수업한다고 늘 바쁘시고 엄만 미용실하니까 바쁘 셨어요. 나랑 동생은 부모님 손을 잡을 시간이 없었어요. 만날 엄마가 손님들 머리 잘라주고 파마 말아주고 이런것만 보고 자라서인지 자연스레 미용사가 되야겠다 생각했지요.서당 개3년 이면 풍월도 읊는다잖아요. 고1때 미용자 격증따고 미용사로 성공하 겠다고 계속 미용쪽으로만 공부하고 일하고.. 그러면서 결혼도 하고 애도 셋이나 낳는데 신랑 회사가 갑자기 문을 닫으면서 어찌 해야 하나 막막할참에 친정 부모님이 아빠고향으로 내려가서 양계장을 하신다고 같이 갈래? 하시잖아요. 신랑이기술도 없제 돈도 없제 뭐 생각 할것도 없이 엄마 아빠 따라 영광으로 왔지요. 부모님하고 우리 부부하고 우리 3남매까지 온가족이 내려왔는데 우와~~ 이 시골 생활이요 만만한게 아니더라 구요. 이게 어렵다 어렵다 해도 우리는 어른들이라 괜찮은데 애들까지 너무 힘들어 하는거에요. 그때 3 살이었던 큰 애가 어린이집 가서 말투 때문에 친구들 한테 놀림당하고 말도 제대로 못하는 애가 머리에 탈모증 세가 나타나고 오줌까지 싸고..정말 그때는 다 때리치 우고 다시 부산으로 가고 싶었어요. 부모님한테 월급을 받으며 양계장일을 하는 남편은 저 하나 믿고 난생처음 영광이란데를 와서 살고 있으니 말할 사람도 없고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엄마까지온 가족이 양계장에만 싸여 있으니 이건 가족이 다 짜증만 늘어가고 안되겠더라 구요. 그래서 두번다신 가위 안잡겠다던 엄마가 미용실을 차리려 가게를 알아보는데 마침 마땅한자리가 있는데 이 자리 인수 조건이 기존에 있던 꽃집을 그대로 인수를 해야 한다는거래요. 그래서 가격대비 가게자리도 괜찮고 해서 무작정 계약 을 했죠. 꽃을 볼줄이야 알았지 꽃향기가 다 다른지도잘 몰랐던 내 한테 꽃가게를 넘겼으니 이게 참 황당하 데요. 그래도 그 꽃들을 시들게 내버려둘순 없어서 꽃강사님을 찾아 꽃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죠. 헌데 이 꽃이 보면 볼수록 알면 알수록 너무 매력적인거에요. 꽃에 대해 욕심이 자꾸 생기더라 구요. 그래서 전 미용가위를 내려놓고 꽃가위를 들기 시작했죠. 지금은 꿈이 생겼어요. 꽃으로 강단에 설꺼에요. 누가 그런 말 했죠. 뭐든 이유 없는게 없다고. 언니 저는 어찌 이 꽃들이 나한테 왔을까 참 어의없다 했는데 나를 살릴라고 이 꽃들이 나한테 온것 같아요. 요즘은 우리 애들도 꽃보며 자라서인가 더 이뻐지고 밝아지고 내가 꿈도 갖고 내가 살아 있다는걸 느껴요. 양계장도 부모님이 우리한테 도 맡아 해보라 권한을 주셔서 남편도 너무 신나게 일하고 있고 힘들땐 지옥처 럼도 느껴졌던 이 영광땅이 지금은 저희한테 천국같아요. 이 곳에서 우리의 꿈과 희망을 다 보고 살아요. 진짜 영광오기 잘했다 싶어요. 엄마 아빠가 일한다고 가게에서자란나는 정말 우리 애들만큼은 내가 집에서 다른 엄마들 처럼 맛있는 간식 만들어 주며 그리 키워 야지 했는데 나 클 때 랑 똑 같 이이리 가게방에서 키워 그게 애들 한테 좀 미안하긴 해요. 그래도 언니 우리 애들 방긋방긋 잘웃고 꽃속에서 사람들 속에서 잘 크고있어요. 내가 이리 살아보니 우리 엄마 아빠 참 열심히 사셨구나 알겠더라구요. 언니 그거 알아요? 이렇게 행복한걸 내가 알고 있어서 행복한거요." 지현씨 정말 살아보니 그렇 더라. 내게 다가온 새로운 사람이든 환경은 이유가 없는게 없더라. 그러니 행복도 슬픔도 끝까지 가는건 없다고 하잖아. 이 행복이 슬픔을 가지고 오는 이유가 될때도 있고, 이 슬픔이 행복을 가지고 오는 이유가 될때도 있더라구. 지금은 이 곳이 천국이라 좋을텐데 또 어려울때도 있을 꺼야. 그때도 지금 지현씨가 겪은 아픔들 또 그뒤에 행복 까지잘 기억해 뒀다가 꼭 이겨 내. 진정 행복을 느끼며 사는 지현씨 참 이쁘다. 꽃보다 향기로운 당신..홧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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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저를 체조영재라고 합니다."나는 13살 김선우 입니다." "사람들은 저를 체조영재라고 말을 합니다. 제 모습이 티브에 나올땐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도 다녔지만 사실 저의 노력을 알아줄땐 뿌듯합니다." 6살때쯤 운동이 하고 싶어 엄마 손을 잡고 태권도학원을 갔습니다. 헌데 제가 티브에서 봤던 태권도 선수들은 막 날라다니는데 그래서 저도 날고 싶어 학원을 갔는데 날지않더라구요. 그래서 엄마한테 날고 싶다고 막 날라다니는걸 하고 싶다했습니다. 그런 제게 엄만 날라 다니는건 체조밖에 없다고 살도 뺄겸 체조장을 가보자 했습니다. 엄마의 모교 영광중앙초등학교 였습니다. 고등학교때까지 체조 선수였던 엄마는 이곳 체조장 위치도 잘알았고 선생님들과도 잘 아셨습니다. 엄마와 체조를 하는 형아들을 보니 이거였습니다. 날라 다녔습니다. 형아 들이 하늘을 날라다녔습니다. 전 엄마한테 체조를 배우겠 다고 했고 엄만 제게 다짐을 받았습니다. 절대 중간에 힘들다 포기하지않기ㆍ왜 체조 시켰냐고 엄마 원망하지않기 ㆍ울지 않기 합숙훈련으로 집을 떠나 스스로 저를 책임져야해도 즐거웠습니다. 손에 피부가 까져 피가나도 기술을 성공할때면 정말 기뻤습니다. 그렇게 4년 정도 하루도 빠짐 없이 정규수업후 3시부터 9시 까지 운동을 하니 하루는 친구 들과 놀고 싶었습니다. 엄마한테 하루만 쉬면 안되냐니 선생님과 얘기를 하랍니다. 운동에 있어서는 모든걸 선생님과 상의를 하라고 해서 선생 님께 하루만 쉬게 해달라 혼날 것을 짐작하고 물어봤습니다. 허나 선생님은 너무도 쉽게 제게 하루 휴가를 주셨습니다. 우리 선생님이 최고라는걸 또 한번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루를 체조생각않고 친구들과 신나게 놀았습니다. 그리고 첫시합에 나갔습니다. 전 3종목에서 금메달을 땄습니다. 초등학생 4학년이 메달을 이렇게 따는건 최초 라고 사람들이 저를 향해 박수를 쳐주었습니다. 뿌듯하단 뜻이 뭔지 생각도 안해봤는데 뿌듯했습니다. 저의 꿈은 제가 19살이나 20살에 올림픽에 나가 금메 달을 따는겁니다. 부모님의 직장생활로 인해 저를 키워 주신 외할머니목에 제가 딴금메달을 목에 걸어 드릴겁니다. 아저씨들 손처럼 두투워진제 손바닥을 할머니는 가슴 아파 하십니다. 하지만 전그게 제 손이라 친구들 처럼 부드럽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냥 할머니가 마음아파 하시는게 마음이 아플뿐입니다. 저는 오늘도 제 꿈을 향해 하늘을 날라 다닙니다. 한일합숙 훈련으로 집을 떠나 있지만 제 자신이 여기 있기에 두려움없이 훈련을 합니다. 제 꿈은 저만이 이룰수 있으니까요. 선우야! 많은 친구들이 아직 꿈이란걸 못 찾았는데 그런 친구들한테 해주고 픈 말 없을까? 무엇이든 조금이라도 흥미가 있으면 시작해봐. 해보고 안맞으면 다시 다른거 해보면 되니까 겁먹지말고 해봐. 선우야 ! 선우 이야기가 신문에실릴건데 마지막으로 하고픈말 있음 해줄래? 할머니가 건강하셨음 좋겠어요. 저 올림픽에서 금메달 딸때까지 건강하게 살아계셨음 좋겠어요. 그게 제 꿈이니까요. 선우야! 지금부터 6~7년 후 선우가 올림픽에서 금메달 따서 외할머니 목에 메달 걸어드리는 모습 꼭 티브로 볼께. 네! 13살 김선우군과 짪은 만남 에서 마음이 훈훈해집니다. 그리고 정말 영광군민들 아이어른 할것 없이 정말 열심히 사는 모습에 매 주 이렇게 군민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훈훈함을 느낍니다. 영광군민이 있기에 영광군은 늘 발전하며 빛나는 고장이 될것임을 믿습니다. 차가워진 날씨에 우리 군민 여러분건강 잘 챙기시고 언제나 응원 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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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남매 엄마ㆍ아빠 로 불리는 것이 더 행복" 오종철(43세)ㆍ홍선미(34)부부"아저씨~ 저 오늘은 등심좀 주세요." "정말 고기 좋아하시나봐요. 요즘 아가씨들 고기 안좋아 하던데, 오늘은 제가 특별히 더 맛있는 고기로 드릴께 요." "아저씨 ~오늘은 국거리로좀 주세요" "이렇게 자주 오시니 고기가 좋아 오시는건지 제가 좋아 오시는건지 이제 좀 헷갈리는 걸요" "뭐에요? 그럼 낼 부터 딴집 갈래요. 이 집 고기가 좋아서 오는거지 아저씨는 착각 하지마요!" "네. 그럼요. 알죠. 매일 이리 오시니 감사해서 그렇죠. 제가 정말 너무 감사해서 그러는데 오늘 저녁 사드릴께 요. 시간 어떠셔요~?" "음~시간은 괜찮은데..." "그럼 오늘 저녁에 저 옆에 식당에서 만나요." 가진거 하나 없는데다 선천성 장애를 지닌 다리로 무작정 축산쪽 전문가가 되고싶어 상경했는데 상상 이상으로 어려운 서울살이에 선미 씨와의 만남은 하늘이 내리신 축복이 아닐수 없었다. 그 날 이후 나의 고기자르는 칼솜씨는 춤을 추듯 발전해 갔다. 그렇게 이 못난 영광촌놈에 게도 세상이 아름답다는 말이 뭔 뜻인지를 느끼며 살고 있는 어느 날 시골에 계시는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종철아~ 아부지가 허리가 너무 아파서 이제 혼자서는 염전일을 못하겠쓰야. 니 헝아도 못한다고만 하니 니가 와서 이 아부지 도와주면 쓰것는디 .." 홀로 염산에서 염전을 하고 계시는 아버지의 전화에 난그길로 다시 짐을 싸 고향으로 내려갔다. 나의 빛이 어둠이 되는 순간 처럼 느껴져 가슴 아팠지만 아버지의 부탁을 져버릴수가 없었다. 염전으로 내려오고 며칠 후이번엔 그 깍쟁이 서울아가 씨한테 전화가 왔다. "아저씨 언제와요." "선미씨 죄송해요. 저 못가요. 아버지가 혼자 계시는데 몸이 너무 불편해서 제가 곁에 같이 있어드려야 해요. 선미씨..정말 미안해요. 좋은 사람 만나요." 영광촌놈..그래. 내 꼴에 무슨 복에 서울아가씨를 만나 "아저씨네 집 영광이라고 했죠?" "네. 전라남도 영광이요" "알겠어요. 내일 전화하면저 터미널로 데리로 오세요." "네?! 선미씨 그게 무슨 말이에요. 오신다구요? 여기 를요?" "아저씨 저 좋아한다면서요. 저 좋아하는 고기 평생 원없이 먹게 해줄거라면서요." "네. 그거야 그렇지만. .선미씨 여기 영광은 아직 시골이 에요. 염전일은 더더구나 힘들고 아버지까지 모셔야 하구 선미씨 너무 힘들꺼에요" "아저씨가 도와줄꺼잖아요." "그거야 그렇지만..정말 오실꺼에요?" "내일 봐요" 뚜뚜뚜 그렇게 영광이 어딘지 염전이 어찌생겼는지도 제대로 모르는 서울아가씨가 영광 댁이 되는 순간이었다. 9살의 나이 차이에도 선미씬 늘 나보다 지혜로운 생각을 해냈고 스물살의 어린 나이지만 스러져가는 나를 일으켜 세울만큼 큰 사람이었다. 소금을 만든다는것이 자연의 뜻에 인간이 따르며 해야 하는 일이라 나의 욕심만으로 할수 있는것이 아니었다. 열심히 일했지만 빚만 늘어 갔다. 힘들게 일궈둔 소금이 내리치는 비에 다 다시 물이 되어 버리 날 내 눈물도 같이 흘러버리며 두번다시 염전 일은 안하겠노라 댜짐을 하고 무작정 선미씨를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 선미씨 뱃속에 내 아이까지 우리 세 식구는 갈곳이 없어 군남의 허름한 빈집을 빌려 들어가 살기 시작했고 임신막달인 아내를 그 한겨울에 냉방에서 지내게 하며 새벽녁 인력센 터를 찾기 시작했다. 허나 불편한 내 다리를 보고 아무리 내가 열심히 하겠다 애를 써도 나를 쉽게 데려가는 이가 없었다. 그렇게 허드렛일을 하고 받은 일당 9만원으로 집에 기름을 채우고 일주일 만에 따뜻한 방온기를 느끼며 행복해하는 아내를 보며 못난 나 자신을 얼마나 원망을 했는지..첨으로 나를 이리 낳아준 내 부모를 원망 했다. 정신차리자. 정신차리자. 를수없이 반복하고 난 이를 악물고 버텨야했다. 배운거 없고 가진것 없는 내가 내 가족을 지키는 거라곤 이 악물고 버티는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내가 살아갈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주변에서 열심히 사는 모습이 대견스럽고 안쓰럽다며 많은 도움을 주셔 뭔가는 계속해서 했는데 야속하게도 하는것 마다 번번히 실패를 했다. 허나 실패할때마다 아이는 한명씩 늘어 난 지금 6 남매 아빠이다. 내 인생이다 실패한것만이 아닌 증거가 바로 선미씨와 나의 6남 매이다.ㅋㅋ 가진것도 없으 면서 아이를 왜 이렇게 많이 낳았냐고들 하시는데 그 심장소리를 듣고 어찌 나쁜 생각을 가질수가 있을까.. 4년전부터 나는 아내와 노 점상을 한다. 중고로 트럭을 한대 사 푸드트럭으로 개조해 매일 아내와 다닌다. 민원으로 쫓겨나기도 여러번. 이런 우리부부를 안쓰럽게 여긴 분의 소개로 지금의 노점자리 땅주인을 만났고 너무도 감사하게 한번에 사장 님의 땅위에서 이제 편히 장사하라고 응해주셨다. 노점 이다보니 허가를 낸건 아니 지만 땅주인이 허락을 해주신 것만으로도 우린 빌딩을 세운 기분이었다. 그 분의 배려 덕분에 작고 허름하지만 아담한 우리의 일터를 마련했다. 아이들도 건강하게 예쁘게잘 자라고 있고 큰아들녀석은 체조선수로 대회에 나가 상도 타왔다. 정말 나의 보물들이다. 없는 집에서 태어나 살아가 는것이 쉽지 않다는건 내 인생이 그러해 누구보다 잘알 기에 내가 부모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 아이들에게 미안할때가 많다. 하필 내가 아빠라서.. 허나 언제 어디서든 나를 보면 부끄러워 하지않고 아빠라 달려와 안기는 내 아이 들이 있고 다시태어나도 나와 다시 결혼하겠다는 선미씨가 있고 출퇴근 할수 있는내 노점가게가 있고. 이만하면 가진것 하나 없던 영광촌놈 출세 한거 아닌가요? 허가 없는 노점이지만 신선한 재료만 쓰겠습니다 .깨끗하게 조리하겠습니다. 저희 집의 가장 큰 단골손님은 저희의 보물 6남매 입니다. 저희아이들이 먹는 음식을 조리해 여러분께 판매할 것을 약속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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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카페 대표 박미진(62년생)님내 삶이 여기서 멈춘다 해도 난 후회가 없다' 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박미진(62년)님. 이 분의 이 말 한마디에 난본인스스로가 지금 얼마나 행복한가를 알수 있었다. 잠시 그녀가 되어 그녀가 읆어 주는 인생에 대해 들어 보았다. 과연 내 삶이 여기서 멈춰 후회없는 삶이라 말할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난 내 삶이 여기서 멈춘다면 부모님도 아닌, 남편도 아닌, 자식도 아닌 나 자신 있게 너무도 미안해서 눈물이 흐르려한다. 주어진 내 삶에서 내 자신을 아껴주지 못함과 사랑해 주지 못한것에 다른 이가 아닌 내 자신에게 미안해 난더 열심히 나를 사랑하며 살려 노력한다. 요즘 흔히 말하는 금수저 냐고? 아니..내 인생도 정말 굴곡이 많다. 굴곡 없는 삶 이 얼마나 있겠냐만은 내가 생각해도 때론 내가 4차원 인가 싶을만큼 엉뚱한 삶인것 같다. 영광서 태어나 자라 도시가서 멋부리고 잘 살다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그리 남들 사는것처럼 살았는데친정아버지의 갑작스런 출가선언이 있고 5남매의 장녀로써 적지않은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의 출가가 이제 이해가 될 만 하니 남편의 부도가 따라왔고 외도까 지, 그렇게 39살에 이혼녀가 되었다. 아버지의 출가를 이해하기 위해 조금씩 배웠던 불교공 부와 명상이 모든걸 포기 하고 싶은 나를 조금씩 일으켜 세우는것에 쓰이게 될줄 누가 알았을까? 이래서 인생은 공짜가 없고 모든것에 이유없는 것이 없다 하나보다. 어느 비오는 밤..홀로 잠을 청하는데 문득 나를 불러보 았다. '미진아..미진아..' 40평 생을 들으며 살아온 내이름 인데 왜 그리도 낯설고 어색 한지.. 홀로 있는 방구석에서 듣는 이 아무도 없는데 한참을 더듬이다 내 뱉은 말이 ' 미진아! 사랑해.. 미진아! 사랑해!! 미진아!사랑해!!!' 수없는 말을 하며 살아 왔는데 어찌 그 가장 쉬운 말 내가 내게 하는 그 말 한마디가 그리도 오랜 시간이 걸리고 힘겨웠을까? 그 날 난 이혼 후 아이들을 떼놓고 나오던 그 날 밤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렸는것 같다. 법당을 차려 기도를 드리던 아버지가 갑작스레 돌아가시고 어머니의 치매가 찾아 오고 난 선택의 여지도 없이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가 앉아 계시던 법당엔 이젠 아버지가 아닌 내가 그자리에 앉아 기도를 드린다. 치매에 류마티스관절염을 앓고 계시는 엄마를 돌보며 나의 명상은 나를 일으켜 세우는 비타민과도 같다. 지인의 소개로 우연히 카페를 차리게 되었고 난 손수 담은 건강차를 타기 시작했 다. 명상공부를 하며 연꽃에 관심이 많던 내게 어느 날그림을 그릴수 있는 시간도 찾아왔다. 그래서 지금 난 육체의 건강을 위해 번거럽지만 손수차 재료를 만들고 마음의 휴식을 위해 그림을 그린다. 내 그림을 보고 어떠한 이는 잘그렸네 못그렸네로 판 단을 하고 어떤 이는 그림의 의미를 물어본다. 내가 그림을 그리며 생각하는 부분을내 그림을 통해 내 생각을 읽어내는 손님들을 보며 그림이 가진 힘을 알았다. 그렇게 나를 사랑할 줄 알고 건강한 차를 많은 이에게 건네고 내 마음 표현할수 있는 그림을 그리는데 어찌 내가 행복하지 않을수가 있을까.. 지금 내 삶이 끝난다 해도 무엇이 후회가 있겠는가? 나는 오늘도 내게 말한다. "미진아...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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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군을 지키는 영광군민들의 삶 이야기 "모종 아가씨~ 이거 빨간양파여?""모종 아가씨~ 이거 빨간양파여?" "네. 아버지. 이거 적양 파에요. 여기 보시면 색깔 보이시죠? 작년에 아버지 심으셨던 그 양파에요. 장날이라 나오 셨어요?" 길에서 모종파는 아가씨로 더 알려진 41살의 조윤경님. 타지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가끔 집에와 모종을 손수 길러 판매하는 부모님을 도와드리다 몸이 편찮아지신 어머님을 대신해 시장에 나와 모종을 팔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권유로 농업기술 센터에 가서 교육을 받기 시작했고, 그 교육들을 들으며 농사의 매력에 빠졌다. 교육생들 중에서도 난 유일한 아가씨 귀농인 처음 어머니를 대신해 이 일에 나섰을때는 길에서 어찌 밥을 먹을지 어찌 물을 마셔야 할지 막막해 밥을 먹지않고 종일 일도 해봤다. 허나 굶주림에 장사없다고 배가 고팠다. 그러니 자연스레 길에 앉아 밥을 먹고 목이 마르니 물도 마셨다. 지금은 어떠냐고 물으면 아침마다 내가 손수 싸온 도시 락을 길거리 일터에서 먹는 밥이 꿀맛같다. 그렇게 난 길에서 모종을 파는 모종아가씨가 되었다. 모종이 뭔지도 모르고 무턱 대고 많이만 팔면 되는건줄 알았는데 모종아가씨 7년차인 지금은 파는만큼 알려도 드린다. 어찌심어야 하는지, 어찌 관리 하셔야 하는지... 농사를 오랫동안 지으신 분들은 그 분들만의 노하우에 고집이 붙어있다. 그래서 농업대학에서 이론으로 교육을 받아온 나의 말에 반기를 드는 어르신들도 많다. 그 분들과 내말이 맞네 틀리네를 하다보면 그 이야기 속에 서도 서로 배울점이 있다는걸 알아간다. 거칠어진 내 손을 보며 날안타까워 보시는 분들도 있다. 허나 실은 목욕탕 한번 갔다오고 로션 한번 쏵~바 르면 내손도 어느 아가씨 못지않은 예쁜 손이 된다. 그러기에 모종을 건네는 내 손이 거칠어보여도 난 창피하지 않다. 봄에는 고추모종을, 여름엔 배추를 이맘 때쯤엔 양파를 파는데 이 모종 들을 사가시면 1년뒤 재미난 일이 생긴다. 어떤 분들은 억정을 내시며 "작년에 모종을 안좋은걸 줘서 농사 다 망쳤잖아!" 하시는 분도 오시고 , 음료수나 빵을 사오시면서 "역시 젊은 사람이라 속이질 않더구만. 작년에 사간 모종 얼매나 실한지 농사 잘 해먹었네. 모종 아가씨 덕에 돈 벌었네 " 하시는 분도 계신다. 난 분명 같은 장소에서 키운 모종을 같은 곳에서 팔았는데 말이다. 그래서 농사는 몇해를 해왔 노라고 큰소리 칠 직업이 아니다. 그 해 농부의 정성과 날씨의 의해서도 많이 좌지 우지 된다. 아직은 모종을 키우는것에 대해선 아버지의 보조일만 하고 판매쪽을 담당하고 있지만 난 계속 해서 공부를 해서 나만의 모종을 키우고 나만의 모종을 팔것이다. 정년퇴직이 13년 남았으니그 후 도와주겠다고 말하는 남자친구의 응원에도, 남들은 쉽게 가지 않는 길을 간다고 힘내라 말해주는 친구 들도, 2남3녀의 장녀로 든든 하다는 가족들의 말속에서난 성공 농부 조윤경을 꿈꾼다. 추운데 거리에서 모종을 파는 나를 보고 후회하지 않냐고 묻는다. 난 이 일을 더 빨리 시작못한 후회만이 있다. 이 곳에서 모종을 팔고 있음 사로 오시는 분들 99명은 어르신이다. 그리고 1명 정도가 내 또래들. 그럼 그 분들도 나도 서로 반가워 서로에게 응원의 말들을 잊지않는다. 더 많은 젊은 이들이 이 시장에 많이 보였음 좋겠다. 정말 알면 알수록 매력이 있는데 이 매력을 많은 젊은이가 알아 청년농부가 많았음 좋겠다. 60대청년 말고 진정한 청년 농부. 난 지금 종자기능사를 따기 위해 공부중이다. 정말 끝이 없는 공부이다. 너무 어렵다. 누가 농사를 쉽다고 말했는지 정말 한평생 농부로 살아오신분들이 존경스럽다. "어머니 판대기로 드려요~ 단으로 드려요?" 모종 아가씨는 오늘도 거리 에서 모종을 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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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군을 지키는 영광군민들의 삶 이야기 Ch3. 옥경아~고맙다!!"옥경아 ...빈 손으로 귀향 하기 정말 힘들었을 텐데 이 못난 나하나 믿고 여기 까지 함께 와줘서 고맙고, 고생을 너무 많이 시켜서 미안하다. 앞으로도 살다 보면 힘든 일 있겠지만 그땐 내가 좀 더 노력해서 조금은 덜 힘들게 할께. 앞으로 좋은 일들만 있을수 있게 할께. 친구에서 부인 으로 여기까지 늘 내 옆자리 지켜줘서 고맙다." 고향에서 먹고 살기 힘들것 같아 20살에 부모님반대에도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다는 최윤복(53)님. 아내에게 쑥스러워 한번도 해본적 없다는 말을 하면서 고개를 떨군다.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 은 한양으로 보내라는 말이 있듯 정말 서울만 가면 다성공할줄 알았다. 수많은 인파속에 내가 하면 뭐든 잘될 거라 믿었다. 고향에서 나의 유일한 안식처는 가끔 만나는 고향 동창들이었고 그 동창들 속에 지금의 내 아내도 있었다. 20살이라는 나이가 한살한살 더해지면서 나의 실패의 좌절은 늘어갔고 그 상처와 처절함은 반복을 해도 똑같이 힘들고 아팠다. 27년의 타향 생활은 나를 만신창이로 만들었고 더 이상 그곳에서 내게 희망이라는 것은 찾을수가 없어 어렵게 가족들에게 내 상처를 조심스레 꺼내었다. 남자로써 남편으로써 아빠로써 정말 심장을 도려내는 아픈 말이 었다. "내가 더이상 여기선 버틸수가 없다. 우리 고향으로 가자" 아내도 아이들도 단 한시의 망설임도 없이 그러겠노라 했다. 반발이 심할거라 생각했는데 이 무능한 가장을 비판할줄 알았는데 가족들의 "그러 자" 라는 말 한마디에 난또 다시 아팠다. 너무도 미안하고 너무도 고마우니 그 또한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다. 그렇게 27년 만에 떠나갔던 부모님의 집으로 다시 돌아 왔다. 혼자가 아닌 내 가족과 함께 였다. 부모님의 억장또한 얼마나 무너졌을지 알기에 정말 힘든 발걸음이었지만 그 곳밖에 갈곳이 없었다. 그렇게 아내와 나의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친구조차 만나기 어려웠다. 그런 우리 부부를 더 찾아와 함께 시간을 보내주고 웃어주고 걱정 해주고 앞날을 함께 고민해 줬던 친구들이 없었음 지금의 나도 없었을 터이다. 어릴적 내고향만 생각하다 성인이 되어 돌아와보니 관광특구가 되어 수많은 인파가 이 속에 있다는 것을 알고 떡집을 다니며 모시송편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 그리고 임대를 얻어 작은 떡집을 차렸고 아내는 수십 개의 떡박스를 들고 관광버 스들을 찾아 오르내리며 시식을 보여드리고 떡을 팔기 시작했다. 밤이면 무릎이 아파 파스로 도배를 해가며 그렇게 수없는 버스를 오르내 리니 조금씩 주문이 들어왔고 그렇게 우린 7년만에 땅을 매입하고 건물을 올렸다. 내가 싫다고 떠났던 내 고향 땅에 보란듯 건물을 세웠다. 아무도 모르게 눈물도 훔치고 아무도 모르게 웃어도 봤다. 그 동안의 내 고생은 괜찮으나 가족들을 고생시켰던 나날이 필름처럼 지나갔다. 난 이제 부터가 시작이다 생각한다. 내인생의 반환점 에서 턴을 했다. 이제 가족 들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고 친구들에게 가로수도 되어 줄 것이다. 고향 땅이 싫다고 떠났던 스물살의 청년은 이제 쉰 셋의 아저씨가 되어 내 고향 땅에서 활짝 웃고 있다 크리에이터 박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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